Monday, November 18, 2013

인식의 울타리 ─ NEVER LET ME GO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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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히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영화가 있다. 영화 아일랜드 (The Island; 2005) 는 인간 복제 기술 (cloning technology) 을 통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를 얻기 위해서 복제 인간을 가두어 기르는 상황을 다루었다. 결국 복제된 인간은 스스로 자각하고 거부하고 투쟁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필요에 의해 소위 '생산되는' 인간들도 인간이 가지는 인격과 자아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과 비슷하게 어쩌면 이야기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상황은 거의 동일한 영화가 있다. 영화 NEVER LET ME GO (2010) 은 시대적 배경은 70년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활기찬 영국의 기숙학교를 시작으로 아주 평화로운 모습으로 시작한다.

NEVER LET ME GO (2010) 

영화 NEVER LET ME GO 는 영화 사이에 삽입되어 흘러나오는 가사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누군가의 장기 공급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갈등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말이기도 할 것 같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복제 인간, 장기 공급을 위해 생산되는 인간 등과 같은 비윤리성,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 등도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영화 한편을 접하고 나서 두 영화가 가지는 공통점에 대한 실마리를 통해서 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 영화는 다소 생소한 그리스 영화 Dogtooth (Κυνόδοντας ; 송곳니 2009) 이다.

NEVER LET ME GO (2010)

DOGTOOTH (2009) 

영화는 어느 한 가정에서 시작한다. 절제된 대사, 조금은 지루해 보이는 영화는 조금씩 영화의 배경을 알게 되면서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 부모는 자신의 자식들을 울타리 안에서 자라게 하면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게 한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서의 교육과 교육 내용은 우리의 일반적 상식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전달된다. 물론 아버지는 울타리 넘어 밖으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바깥 세상은 위험하기 때문에 다 자라 '송곳니 (dogtooth)' 가 빠지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DOGTOOTH (2009)

두 영화를 보고 나면 두가지 당혹감이자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 된다. 두 영화는 모두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NEVER LET ME GO 의 경우 좀더 확장된 사회의 개념이고 DOGTOOTH 의 경우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의 개념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족을 포함한 어떤 사회도 고립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특이한 현상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영화라는 점을 고려해서 생각해야겠지만 두 영화 모두 고립되어 전달되는 언어 체계를 보여준다. '일반적'이란 말의 정의가 어렵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 입장에서 영화 속 인물들을 직접 만난다면 언어적 소통이 조금은 어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만들었다. 즉, 아무리 같은 영어를 쓰고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단어, 문장을 쓰는 의미가 그들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NEVER LET ME GO 에서는 죽음을 COMPLETION (COMPLETE ; 죽다) 라고 말하고, 자신이 복제된 원래 인간을 표현할 때 직접적 표현보다는 ( ... WHO I AM MODELED ON ) 이라 말한다. 또한 일상의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황극을 통해서 연습시킨다. DOGTOOTH 는 그런 언어의 고립 현상을 더욱 더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리스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느낌을 전달받기 어려웠지만 영화의 초반부터 나오는 언어 학습 테이프를 통해서 가족 안에서 정의된 단어와 실제 외부 세계에서 정의된 단어를 다르게 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아버지는 그들이 언어를 통해서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도록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지적 호기심을 끊을 수 있는 단어의 뜻을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려움이 작동하는 울타리 

자신이 기르는 양이나 가축을 지키기 위해서 울타리를 친다. 울타리를 통해 영역을 표시하여 외부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영역에 있는 존재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내부의 존재를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두려움' 이라는 점이다.

NEVER LET ME GO (2010)

NEVER LET ME GO 의 한 장면은 그런 두려움이 작동하는 가장 효과적인 울타리를 보여준다. 공놀이를 하다가 울타리 넘어로 넘어간 공을 두고 모든 아이들이 공을 찾으러 나가지 않는다. 이에 의문을 품은 신입 교사는 물어본다. "왜 공을 찾으러 안가니?" 아이들은 당연한듯 이야기한다. 울타리 넘어 가면 뭔가 자신들을 해칠 무엇인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렇게 당했던 알 수 없는 소문을 진실로 믿고 있다. 가축들이 울타리 넘어로 넘어가지 못하게 마치 울타리 전체에 전기를 흐르게 해서 넘어갈 때 전기가 주는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울타리를 넘어가지 않는다. 사실 전기가 주는 고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이상의 무엇인가 나에게 주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가능성'이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라는 점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DOGTOOTH 도 마찬가지이다. 울타리 넘어의 위험 요소를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구체화시키고 그것이 어떻게 위험이 될 수 있는지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막이 된다.

스템에 순종적인 인간들 

사실 두려움은 충분히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이다.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좋은 방어 기재이기도 하고 반복되는 위험에 대해서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계속되어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호기심이 사라지게 되는 순간 인간이 믿는 내용들은 일종의 코메디 혹은 황당한 이야기가 된다. 두 영화가 공통으로 주는 두번째 공통점은 비현실적 황당함이다. NEVER LET ME GO 는 비현실적 상황에 대해서 너무도 진지하게 다가간다. 보통 장기 기증을 3번정도 하고 생명 유지가 어렵거나 너무 힘들기 때문에 죽는 것 (COMPLETION) 을 택한다. 그런데 이 집단 중에 사랑하는 연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3~4년 정도 장기 기증을 유예 (DEFERRAL)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래서 결국 주인공 들은 이 유예 제도에 적용되기 위해 관리자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유예 제도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시스템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한 예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들의 그림을 선택해서 전시하는 갤러리 시스템을 '진짜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 이라고 자신들 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NEVER LET ME GO (2010)

NEVER LET ME GO 는 죽음이라는 절박한 상황때문에 시스템의 목적과 이유를 오해하고 그 잘못 인식된 시스템에 순종하기 위해서 황당한 결정과 행동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황당함'의 반대편을 DOGTOOTH 는 보여준다. 그 황당함은 너무 어이없는 상황이다. 고립된 가족들만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진지하고 전혀 웃기지 않지만 외부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너무도 황당하고 황당하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다. 그런 이유에서 일부 영화 소개 사이트에서는 이 영화 장르를 '코메디'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만큼 영화 내내 보여주는 내용은 상당히 진지한 코메디 같은 내용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시종일관 영화 속 주인공들은 진지하다. 그들은 그 삶이 무척 일상적이다. 그러나 그 일상적 행동들은 우리들의 눈에는 너무도 우습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가족들만이 가지는 시스템에 순종적인 그들은 결국 외부의 시선에서는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그런 이유로 고립된 사회가 보여주는 황당함의 결과는 때로는 유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식의 울타리 속 인간들 

두 영화는 조금 지루했지만 끝까지 흥미를 이끄는 극적 긴장감은 액션 영화만큼 충분했다. (물론 이 부분은 개인적인 느낌이니 절대 참고하지 않기를...) 인식의 울타리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황당함이 단지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런 인식의 울타리는 외국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문화적 차이, 삶의 방식 때로는 너무 이해가 안되는 문화적 풍습 등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당황스러움은 영화가 주는 황당함과 그 맥락이 비슷할 때가 많다. 다만 이런 문화적 차이점에는 우리가 알고자 한다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차이점은 있을 것이다. 즉, 울타리를 넘는 두려움은 다소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화적 차이도 결국 인식의 울타리 안에서 익숙해져 울타리 안의 세상이 만든 시스템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시스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당황해 할 수 있게 된다.

불편한 진실을 모르고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A
불편한 진실을 알면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B
불편한 진실을 모르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 C
불편한 진실을 알면서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 D 


특별한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 이 땅에서 나오는 석유가 실제로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추출해서 만들어진 것이란 말도 안되는 내용이 진실이 되어버렸을 때 위의 네명 중 누가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모른다는 것은 때로는 무시한다는 것과 실질적으로 같을 수 있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사람 A 가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일단 그런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다는 자체가 수식어가 표현해주듯 '불편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식의 울타리 넘어... 

[ 두려움의 현기증을 즐기자. ] 어떤 경계에 선다는 것은 항상 두려운 일이다. 알 수 없는 세상에 다가가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 경계에는 항상 우리가 모르는 인식의 울타리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잘 살아가고 울타리 안의 시스템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시스템에 손종하며 잘 살아가기 때문에 울타리 밖의 '무엇인가 다른 것 (something different) 은 황당한 것 (something absurd;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것) 으로 간주한다. 그것이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두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우리의 황당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에서 진지하고 충분히 정상적인 무엇인가도 인식의 울타리 넘어 있는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영화를 보는 '황당홤'처럼 어이없이 진지하고 우스꽝스러운 세상일지 모른다. 즉, 우리 세상이 황당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정치적 대립이 극명한 상황에서 정치인들의 발언 등을 보면서 '인식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주는 공포와 유머는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황당함'과 일면 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비록 물리적으로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그 진지한 황당함, 우스꽝스런 황당함 모두 인식의 울타리가 다른 세상에서 살면서 인식의 울타리 넘어 가보려는 호기심보다 순응하며 살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DOGTOOTH (2009)

예를 들어 아무리 현제의 정치 제도가 자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다고 해도 그 현실적 배경과 다르게 어떤 이들에게는 마치 '절대 왕정' 이라는 인식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살아간다면 충분히 가능하고 해석 가능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리가 사는 인식의 울타리

어린 시절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은 무엇이냐 물으면 누군가는 '재벌 아빠' 정도로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은 '낯선 곳으로 여행'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인식의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는 가장 큰 호기심은 경계와 울타리가 주는 두려움과 공포를 충분히 이기게 만든다. 그래서 교통이 불편하던 고대시대부터 '방랑자', '순례자' 는 항상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때문에 환영받게 된다. 낯선 세상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느끼지 못하던 시스템에 대한 호기심은 우리의 삶을 자극시키는 하나의 촉매가 된다. 물론 그 호기심을 위해 때로는 고통을 느껴야 하기도 하지만 순수한 여행자들에게 그런 고통은 그저 즐거운 경험이 될 뿐이다.


영화 NEVER LET ME GO 의 처음부터 끝까지 왜 주인공들은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했는가 질문을 하게된다. 초반에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소위 졸업을 하고 장기 이식을 위해 외부 세계에서 생활하는 몇년간의 삶 동안 그들에게 물리적인 울타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시도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죽음 (COMPLETION) 을 순응해야 했다. 그만큼 우리에게 더욱 더 무서운 것은 죽는 순간까지 두려움에 벗어나지 못하고 순종하는 사회의 시스템은 우리들이 인식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정치인이 잘못했다 잘했다 의 소위 정의의 문제 (a matter of justice) 를 이야기하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인식의 울타리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때로는 이때문에 서로를 파괴하는 과정까지 가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인식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우리가 두 영화를 보며 느끼는 황당함처럼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이미 충분히 황당하고 어이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수한 여행자가 되고픈 마음 

순수하다는 것은 순종적이란 말과 다를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어쩌면 사회가 만든, 마치 두 영화에서 만든 기숙학교나 고립된 가족과 같은 시스템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때로는 인간이 가진 가장 순수한 호기심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울타리를 넘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과 공포의 요소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불합리한지 최소한 검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것이다.


그렇게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는 순수한 여행자가 세상에 많아진다면 세상의 옳고 그름을 위해 피를 토하며 주장하지 않아도 무엇이 황당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순수한 여행자란 인식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결국 NEVER LET ME GO 라며 나가고 싶은 마음에도 스스로 나가지 못하는 결정을 내리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LET ME GO 가 아닌 왜 LET MYSELF GO 인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도 생각해볼 주제가 아닐까 싶다. 결국 그들을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시스템에 순종하며 두려움에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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